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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7.01.25 이스탄불의 역사
  2. 2007.01.25 터키의 역사
 

스탄불의 역사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매우 중요한 곳에 자리해 예로부터 이스탄불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 과거의 수많은 유물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건 당연지사.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이스탄불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BC650년경 에게해의 해양부족은 비자스(Byzas)의 지휘 아래 고대 그리스의 번성했던 도시 메가라(Megara)를 떠나서 새로운 땅을 찾고 있었다.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비자스는 델피(Delphi)의 아폴로 신전에서 ‘눈먼 자들의 땅(Land of Blind) 건너편’에 정착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이주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땅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지금의 이스탄불을 발견하게 됐고, 기름진 땅과 천혜의 항구 골든 혼(Golden Horn)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당시 그들이 정착한 땅의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주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땅을 놔두고 반대쪽에 정착한 사람들은 눈먼 자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예언이 말했던 그 땅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도시는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부르게 됐다. 아직까지도 골든 혼과 아시아 쪽에서는 BC30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비잔티움은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하며 독립적인 도시로 발전했으나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BC512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에 이어 여러 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중심이 됐다. 로마 공화정 아래에서는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 시기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무역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곳에 있었으며 성벽은 이곳에서 시작해 마르마라해 연안까지 닿았다. 4세기에 로마제국은 그 영역이 점점 더 커지게 됐고, 따라서 수도인 로마(Rome)는 위치상 중앙에 위치하지 않게 됐다.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는 바다와 육지가 교차하고 완벽한 날씨를 가진 전략적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택해 새로운 성벽을 건축하고 도시를 확장했다. 많은 사원과 정부, 궁전, 목욕탕, 히포드롬이 지어졌고 비잔티움은 330년에 마침내 공식적인 로마 수도로 선포됐다. 초기에 도시는 Second Rome, New Rome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됐다. 이 시기에 도시는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됐으며, 그리스도교의 종교 중심지가 돼 새로운 길과 건축물, 기념탑이 건축됐으며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다.

로마제국은 395년에 둘로 나뉜다. 서로마는 5세기에 멸망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제국(동로마)은 이후 1,000년간 번성했다. 5세기 초에는 6,452m에 이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재건축으로 도시가 더욱 넓어졌으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유명한 아야소피아 성당 역시 이 시기에 지어졌다. 비잔틴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후기시대는 궁전과 교회의 음모가 넘쳤으며 페르시아와 아랍의 공격도 잦았다. 이런 혼란을 틈 타 내부 황족간의 싸움도 끊이질 않아 왕좌가 자주 교체되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726~842년 사이에는 역대 황제들의 성상 파괴운동으로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이미지가 제한됐으며 그림과 조각상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라틴세계의 침입은 콘스탄티노플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다. 4차 십자군 원정 때 시작된 침입으로 많은 교회와 수도원, 기념탑이 약탈당했고,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받았다. 비잔틴은 1261년에 다시 도시 통치권을 회복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예전처럼 번영하지 못했다. 마침 이 시기에 확장하던 오스만 정권의 위협은 극에 달해 대구경 대포를 앞세운 메흐멧2세(Mehmed II)에 의해 1453년 53일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21살이었던 메흐멧2세는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자들을 데려왔으며, 이전 거주자에게도 사회적인 권리를 주는 등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주자들에게는 숭배의 자유를 보장해 불만의 소리를 없앴는데 그리스 정교 관저가 오늘날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구가 늘면서 황폐화된 도시는 빠르게 재건축됐다. 여러 교회들이 모스크로 개조되는 등 이스탄불은 짧은 시기에 완전히 재건축됐으며, 1세기 후에 터키식 문화와 예술은 온 도시에 퍼지고 돔과 모스크의 첨탑인 미나레(minaret)가 하늘을 뒤덮었다.

16세기 오토만 술탄이 이슬람 정권연합회를 인수했을 때 이스탄불은 이슬람세계의 중심이 됐다. 도시는 완전히 재건축됐고 놀랄 만큼 고급스러워졌다. 서방세계와의 교류도 많았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유럽 스타일의 모스크와 궁전이 보스포러스 해안을 따라 건축되기도 했다.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종말을 보게 된다. 오스만 정권은 나라 안팎의 적들로 붕괴되고 터키 군대의 훌륭한 지도자가 터키를 대표해 투쟁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민족의 영웅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다. 모든 국민으로부터 나라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아타튀르크는 4년 이상 지속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그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했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라틴 알파벳을 채용하고, 여성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개혁을 이뤘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 나라의 발전에 가속을 더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930년에 공식적으로 채택해 부르게 됐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당시 터키공화국은 이미 서유럽세계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수도가 앙카라로 이동됐지만 이스탄불은 변함없이 중요한 도시로 인정 받았다. 화려했던 역사의 흔적과 현대 문명이 어우러진 이스탄불은 여전히 아름다운 환경과 생활모습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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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피 민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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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역사

1. 기원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과 더욱 가까워진 터키. 터키와 한국의 친밀한 관계는 월드컵 이전인 6.25전쟁에서도 보여진다. 6.25전쟁 당시 터키는 한국에 5,000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로 했지만 결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1만5,000명의 병력을 보냈다. 너도 나도 한국으로 가겠다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한국과는 멀다면 먼 터키가 한국에 이런 친밀감을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들의 조상에서부터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터키족의 조상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중앙아시아에 살던 유목민족이 흉노족의 조상이 됐고 흉노족은 후에 돌궐제국을 세웠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돌궐제국은 고대 고조선 시대의 연맹부족으로 고구려와 힘을 합쳐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터키가 형제의 나라로 알려지게 됐다.

흉노족은 기마와 궁술에 능해 중국의 진시황제도 그들을 두려워했고 결국 만리장성을 쌓아 흉노족을 경계했다. BC36년, 강대했던 흉노는 쇠퇴기를 맞아 북흉노와 남흉노로 갈라진다. 북흉노는 멸망하게 되고 남흉노는 중국에 속한다. 이후에 흉노족은 서쪽으로 진출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다. 흉노족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유럽까지 진출해 훈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현재 투르크족 만큼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민족도 드물다. 터키에 거주하는 6,500만 명을 포함해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에 분포하는 전세계 투르크족은 1억만 명이나 된다.

2. 고대시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점에 자리한 터키에는 11세기에 터키민족이 들어오기 전부터 여러 민족이 거주, 교류하며 문화접촉이 이뤄졌다. 아나톨리아 중앙부 챠타르 휴유크에는 BC6000년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아나톨리아 원주민 농경취락유적이 있다. 동기(銅器)를 바탕으로 발전한 트로이 1기 문명은 BC3500년경에 번성했으며, BC2500년경에는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BC2000년에는 아나톨리아에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큰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지며, 북쪽에서 히타인들이 내려와 아나톨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BC1600년경에 히타이트왕국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세계 최초로 철기문화를 발전시키며 번영했다. 라바르나가(BC1680~BC1650년)가 초기 히타이트의 최초의 왕이 됐고, 그의 아들 라바르나2세와 하투실리1세는 영토를 넓혀 유프라테스강까지 접근했다. 이로써 아나톨리아인들이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의 공격에 대항했다. 이후 히타이트는 물실리 2세(BC1339~BC1306) 때 전성기를 이뤘으며, 시리아로부터 말레토까지 아나톨리아반도 대부분을 장악했다. 히타이트 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투타리아4세(BC1250~1220) 때부터다. 히타이트는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알눌반다3세(BC1220~1200)에게로 왕위가 넘어간 것이다. 그의 형제 슈피루리우마2세(BC1190~1180) 때에는 프리기아의 공격을 받아 히타이트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3. 중세시대

-페르시아시대(BC900~BC334)

BC11~BC8세기에는 그리스의 식민정책으로 이오니아인, 도리아인이 에게해와 흑해 연안지역에 들어와 밀레토스, 크니도스, 시노프 등의 도시가 발달했다. BC730년 내륙부에는 리디아왕국이 생겨 지금의 사르트(성경의 사데)를 수도로 정하고 활약했다. 그들은 풍부한 자원과 비옥한 토지를 바탕으로 부유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리디아왕국은 BC546년 아케메네스왕조인 페르시아에 정복돼 그리스의 식민도시를 포함한 소아시아 전 지역이 페르시아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페르시아제국은(BC900~BC334)은 현재 이란의 남부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전성기에는 이란, 터키, 이집트, 인도와 북서쪽 변경까지 세력을 넓혔으며, 고대 그리스와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지중해의 패권을 다퉜다.

-헬레니즘-로마시대(BC334~395)

이후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를 융합한 헬레니즘문화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마케도니아 출신인 알렉산더대왕은(BC356~323)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지만 BC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한다. 이후 마케도니아, 시리아,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왕조, 카파도키아, 페르가몬 등의 왕국이 난립했으며 북동부에는 폰토스왕국이 탄생했다. 이들 나라는 BC2세기 말~BC1세기 초에 로마에 정복당해 300년 동안 지배를 받는다. 330년. 드디어 로마의 수도가 현재의 이스탄불 위치로 옮겨오게 된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분열로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서면서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존의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 개명해 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전시킨다.

- 비잔틴제국시대(395~1453)

기독교화 된 로마제국, 즉 동로마제국이 바로 비잔틴제국이다. 그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기독교는 이 시기에 공인을 받아 국교의 위상을 지니게 된다. 비잔틴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성소피아성당 역시 이 시기에 건축됐다. 7세기에 비잔틴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이슬람(사라센)제국에 잇따라 위협을 받았다. 셀죽투르크족은 BC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뤘는데 그 중에는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다. 11세기에 중앙아시아 셀죽투르크족이 소아시아를 침입해 현재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 셀죽을 건설했다. 이로써 투르크족이 현재 터키 영토, 즉 아나톨리아 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4. 셀죽투르크(990~1157)

셀죽투르크는 11세기 중엽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다. 기독교인들의 성지라고 하는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순례자들을 박해하자 전 유럽이 단합해 십자군을 결성, 200여 년에 걸쳐 여덟 번의 전쟁을 펼치지만 결국 이기지 못한다. 셀죽투르크는 처음에 이즈닉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나중에 콘야로 수도를 옮겼다. 지금의 소아시아반도 지역을 완전히 투르크의 영역에 편입했고,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유럽의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이후 점차 세력이 쇠퇴해 1157년 셀죽왕조가 망함으로써 이란의 종주권을 잃었다. 독립적으로 대항하던 분파정권 역시 몽골인의 서진(西進)을 막다가 1307년 오스만투르크에 항복했다.

5. 오스만제국시대 (1299~1922)

오스만투르크는 셀죽투르크가 멸망한 뒤에 독립을 선언한 부족국가다. 비잔틴제국이 약해진 시기인데다가 많은 부족들이 경쟁하는 중부 아나톨리아로부터 떨어져 부르사, 이즈닉 지역에 정착해 견제도 적었다. 오스만은 1299년에 국가를 세우고 1324년까지 영토를 확장해 아나톨리아 지역을 장악한다. 14세기에는 소아시아 이외에 유럽에 진출, 발칸반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술탄아흐멧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비잔틴제국을 정복하면서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이른다. 결국 이 지역은 기독교에서 이슬람문화로 또 다시 변하게 된 것이다. 16세기 술레이만대제 시대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며 전성기를 이었다.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한다.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축소됐으며, 19세기에는 그리스와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는 등 차츰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오스트리아에 가담했다가 패배, 연합국과의 세이블조약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배후지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됐다. 그러나 1922년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Pasha)의 외교와 전략으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기고, 1923년 7월 로잔(lausanne)조약에 의해 현재의 영토를 확보했다.

6. 공화국 시대

1923년 10월 군주제를 폐지하고 앙카라를 수도로 정하며 터키공화국이 발족됐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는 정교분리, 로마자 채용, 태양력 채용 등 여러 방면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중립을 지키다가 말기에 독일과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52년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노선을 취했다. 1960년 이후, 군부쿠데타와 테러가 자주 일어나는 등 정치불안이 계속됐으며, 1965년 10월 데미렐이 총선에서 승리해 1971년까지 집권했다. 1980년 9월에는 에브렌 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가 일어나 국가보안평의회(NSC)를 설치,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1983년 11월 총선에서 외잘의 조국당 집권 이후 군사정부 수립 후 3년 만에 민정으로 복귀됐다. 하지만 정파 이익에 따른 상호 연립내각의 구성과 해체를 반복함으로써 빈번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2년 3월 소수민족 쿠르드족의 독립요구를 군이 무력으로 진압 1,000여 명을 사살했다. 1993년 5월 총리 술레이만 데미렐이 대통령에 선출됐으며 2000년 현행 헌법 규정에 의거, 아메드 넥다트 케제르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이며 연임할 수 없다. 2005년 4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해 양국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2007년은 ‘한·터키 우정의 해’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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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피 민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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