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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탄불의 역사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매우 중요한 곳에 자리해 예로부터 이스탄불을 차지하려는 세력들의 각축장이 돼 왔다. 과거의 수많은 유물과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남아 있는 건 당연지사. 이스탄불은 도시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 만하다.

이스탄불의 건립과 관련된 전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BC650년경 에게해의 해양부족은 비자스(Byzas)의 지휘 아래 고대 그리스의 번성했던 도시 메가라(Megara)를 떠나서 새로운 땅을 찾고 있었다.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비자스는 델피(Delphi)의 아폴로 신전에서 ‘눈먼 자들의 땅(Land of Blind) 건너편’에 정착하라는 신탁을 받았다. 이주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그 땅을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지금의 이스탄불을 발견하게 됐고, 기름진 땅과 천혜의 항구 골든 혼(Golden Horn)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당시 그들이 정착한 땅의 반대편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주자들은 이렇게 아름다운 땅을 놔두고 반대쪽에 정착한 사람들은 눈먼 자들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예언이 말했던 그 땅을 찾았다고 확신했다. 도시는 비자스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부르게 됐다. 아직까지도 골든 혼과 아시아 쪽에서는 BC3000년경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비잔티움은 상업과 무역으로 번성하며 독립적인 도시로 발전했으나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BC512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에 이어 여러 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중심이 됐다. 로마 공화정 아래에서는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69~79) 시기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으며 무역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항구도시로 발전했다. 도시의 아크로폴리스는 현재 톱카프 궁전이 자리한 곳에 있었으며 성벽은 이곳에서 시작해 마르마라해 연안까지 닿았다. 4세기에 로마제국은 그 영역이 점점 더 커지게 됐고, 따라서 수도인 로마(Rome)는 위치상 중앙에 위치하지 않게 됐다.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는 바다와 육지가 교차하고 완벽한 날씨를 가진 전략적 위치에 있는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택해 새로운 성벽을 건축하고 도시를 확장했다. 많은 사원과 정부, 궁전, 목욕탕, 히포드롬이 지어졌고 비잔티움은 330년에 마침내 공식적인 로마 수도로 선포됐다. 초기에 도시는 Second Rome, New Rome 등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됐다. 이 시기에 도시는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됐으며, 그리스도교의 종교 중심지가 돼 새로운 길과 건축물, 기념탑이 건축됐으며 많은 교회들이 지어졌다.

로마제국은 395년에 둘로 나뉜다. 서로마는 5세기에 멸망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틴제국(동로마)은 이후 1,000년간 번성했다. 5세기 초에는 6,452m에 이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의 재건축으로 도시가 더욱 넓어졌으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통치 아래에서 황금기를 맞이했다. 유명한 아야소피아 성당 역시 이 시기에 지어졌다. 비잔틴제국과 콘스탄티노플 후기시대는 궁전과 교회의 음모가 넘쳤으며 페르시아와 아랍의 공격도 잦았다. 이런 혼란을 틈 타 내부 황족간의 싸움도 끊이질 않아 왕좌가 자주 교체되며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됐다. 726~842년 사이에는 역대 황제들의 성상 파괴운동으로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이미지가 제한됐으며 그림과 조각상을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라틴세계의 침입은 콘스탄티노플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다. 4차 십자군 원정 때 시작된 침입으로 많은 교회와 수도원, 기념탑이 약탈당했고, 로마 카톨릭의 지배를 받았다. 비잔틴은 1261년에 다시 도시 통치권을 회복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예전처럼 번영하지 못했다. 마침 이 시기에 확장하던 오스만 정권의 위협은 극에 달해 대구경 대포를 앞세운 메흐멧2세(Mehmed II)에 의해 1453년 53일간의 포위 끝에 마침내 함락되고 말았다. 당시 21살이었던 메흐멧2세는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고 다른 지역에서 이주자들을 데려왔으며, 이전 거주자에게도 사회적인 권리를 주는 등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주자들에게는 숭배의 자유를 보장해 불만의 소리를 없앴는데 그리스 정교 관저가 오늘날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구가 늘면서 황폐화된 도시는 빠르게 재건축됐다. 여러 교회들이 모스크로 개조되는 등 이스탄불은 짧은 시기에 완전히 재건축됐으며, 1세기 후에 터키식 문화와 예술은 온 도시에 퍼지고 돔과 모스크의 첨탑인 미나레(minaret)가 하늘을 뒤덮었다.

16세기 오토만 술탄이 이슬람 정권연합회를 인수했을 때 이스탄불은 이슬람세계의 중심이 됐다. 도시는 완전히 재건축됐고 놀랄 만큼 고급스러워졌다. 서방세계와의 교류도 많았기 때문에 19세기까지 유럽 스타일의 모스크와 궁전이 보스포러스 해안을 따라 건축되기도 했다.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다 1차 세계대전 후에 이스탄불은 오스만 제국의 종말을 보게 된다. 오스만 정권은 나라 안팎의 적들로 붕괴되고 터키 군대의 훌륭한 지도자가 터키를 대표해 투쟁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민족의 영웅 아타튀르크, 케말 파샤다. 모든 국민으로부터 나라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아타튀르크는 4년 이상 지속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1923년 터키공화국을 세우고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다. 그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여 개혁을 단행했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라틴 알파벳을 채용하고, 여성 투표권을 인정하는 등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개혁을 이뤘는데 그 중에서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해 나라의 발전에 가속을 더했다.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은 1930년에 공식적으로 채택해 부르게 됐다.

1938년 아타튀르크 사망 당시 터키공화국은 이미 서유럽세계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수도가 앙카라로 이동됐지만 이스탄불은 변함없이 중요한 도시로 인정 받았다. 화려했던 역사의 흔적과 현대 문명이 어우러진 이스탄불은 여전히 아름다운 환경과 생활모습으로 전 세계 여행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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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함피 민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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